기획연재 | [정진원의 세계여행] 백제의 후예 성덕태자, 그의 오사카 사천왕사와 예복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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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5-23 13:17 조회4,368회 댓글0건본문
어쩜 쇼토쿠태자와 전생부터 만나기로 한 건 아닐까… 수차례 일본 여행 중 우리 말로 성덕 聖德 이요, 일본 발음으로 쇼토쿠인 태자를 주제로 태어난 곳과 활동한 곳, 그리고 죽어서 묻힌 곳까지 답사를 하게 된 것은 운명이라고 할 밖에…. 우리는 지난 호에서 성덕태자가 태어난 귤사의 4수 관음과 원효의 무애박처럼 생긴 관음당과 태자전을 둘러 보았다.
성덕태자, 우리에게 익숙한 7세기 전후 아스카시대의 걸출한 인물이 백제의 후예인 줄 필자는 최근에서야 알았다. 스이코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인데 백제 도래인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왕위를 계승하고 섭정하였던 성덕태자는 또한 스이코 천황의 조카였다. 백제 도래인 3대가 불교를 받아들여서 아스카사를 백제 장인들이 짓고 완공식 날 이 셋을 위시한 100여 명이 백제 옷을 입는 장관이 연출되었다고 기록에 전한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필자는 7세기로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원효, 의상, 김춘추, 김유신, 선덕과 선화 자매, 그리고 쇼토쿠태자까지 한 세기를 호령하던 인물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인가 왠지 모르게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아스카를 걷고 걸으며 시나브로 알게 된 아스카 역사와 그 중심의 성덕태자.
그는 일본에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로 일본의 석가모니 또는 우리나라 세종 쯤으로 추앙되며 일본의 태자신앙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태자太子는 꼭 왕자가 아니더라도 왕위 계승자일 때도 쓰인다. 쇼토쿠 태자의 본명은 우마야도인데, 태자가 마구간 앞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작은아버지인 소가노 우마코의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호칭인 성덕盛德은 태자가 불법을 널리 알리고 선양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에 붙여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태자의 한창 시절에 지은 법륭사와 사천왕사, 그리고 묘소가 있다고 비정되는 예복사(에이후쿠지)를 중심으로 여행할 것이다. 법륭사와 백제 관음은 이미 앞서 소회를 피력했으니(2018.6. 법륭사의 슬픈 백제 관음) 이제 사천왕사로 출발해보자.
길치여서 제격인 여행가의 길
필자는 지독한 길치이다. 오죽하면 터키에 살 때도 다섯 살짜리 딸이 항상 앞장을 섰겠는가. 무살이 넘어 유학을 가면서 오직 하나, ‘우리 엄마 길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야’하고 떠났다. 그후 보란 듯이 번번이 길치의 역사를 쓰며 여행가의 길을 가고 있다. 그나마 요즘은 길 찾기 앱으로 어찌어찌 신기술을 터득해 다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을 잃지 않을까 보냐. 일단 필자는 직진 본능이 있다. 목표물과 비슷하다 생각되면 직진하고 본다. 보통 다시 유턴을 해야 한다. 사천왕사 가는 길도 그러하였다. 그래서 뜻밖에 횡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길찾기 달인이라면 만날 수 없는 의외의 절들을 무수히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덕분이다. 한마디로 사천왕사 근처는 각종 다양한 종파의 절이 즐비하였다. 도라에몽 지장보살을 모셔놓은 절이 있는가 하면 밀교에서나 나올 법한 허공장보살을 모신 절도 있었다.
‘사천왕사 왓소’ 마츠리의 무대 사천왕사
시텐노지[四天王寺]는 오사카 한복판에 있었다. 필자에게 사천왕사는 예전부터 ‘사천왕사 왔쇼이’라는 마츠리(축제)로 유명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일차 소원을 이뤘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한반도의 문화와 문명 즉 불교와 한자, 도예, 건축, 생활양식 등을 전한 왕인 박사를 비롯해 탐라,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 조선 등에서 도래한 사람들의 수행행렬과 사절단을 맞이하는 가장행렬이다. 10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오사카 시내를 가로질러 사천왕사에 이르는 동안 길가의 수많은 인파는 우리말 ‘왔소’에서 비롯된 말인 ‘왓쇼이, 왓쇼이’를 외친다고 한다. 언젠가 꼭 참가해보고 싶은 일본 축제이다. 아무튼 현재의 오사카 사천왕사가 있는 마을은 신라시대 헌강왕 시절에 절집의 기와가 기러기 줄처럼 나란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구절이 떠오르며 그때 모습이 오버랩되어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이었다.
길을 헤매다 찾아간 사천왕사 또한 하나의 작은 동네를 이루고 있었는데 꽤 넓은 가족묘역과 화원을 지나니 새로 지은 5중보탑이 보인다. 그리고 이름이 묘한 ‘육시례찬당六時礼讃堂’도 있다. 그 앞의 연못을 지나면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종루에서 자동으로 종이 쳐서 종소리가 난다. 이 절을 짓고 불교의 중흥조가 된 성덕태자는 고구려 혜자와 백제의 혜총스님으로부터 일본 최초의 절 법흥사 法興寺 (593년 나중에 아스카사)에서 불교를 배웠다고 한다. 일본에는 538년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되긴 하였으나 토착 종교인 신도 神道 가 성행하였고, 유교도 생활 규범으로 자리 잡아 태자는 이들을 융합한 일본 불교가 자리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하여 사재를 털어 법륭사法隆寺 를 지었고, 17조 헌법을 만들어 삼보를 공경할 것을 명하고 선악의 도리로 불교를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사천왕사를 벤치마킹하고 싶은 휴게소
사천왕사를 소요하며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은 찾아오는 불자들의 휴게소가 넓고 쾌적하다는 것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쉬기도 하고 가져온 도시락이나 과일을 까먹기도 한다. 매점이나 가게는 없고 자판기 정도 있는 것 같다. 필자가 책도 보며 다리쉼을 하며 혼자 앉아 있자니 역시 혼자 온 할머니들이 옆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시곤 귤을 나눠주기도 하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일본말을 잘한다고 연신 칭찬. 더 이상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는 나의 일본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도 잘 안 다니는 역사유적을 답사한다니 기특해 보였나 보다. 한 할머니는 일본 사찰 순례 종이를 고이 접었다가 보여주면서 사천왕사 순례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티비에서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수십 개의 절을 순례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일본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렇게 홀로이 씩씩하게 순례와 답사를 다닌다. 아스카에서도 겨울이고 비수기인데도 꼭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적지를 찾아가다 만나는 사람은 할아버지이거나 할머니가 많았다. 우리보다 앞서 노령화가 된 일본에서 살아남는 법을 엿본다고 할까, 내 인생의 롤모델을 만난다고 할까. 그들은 검소했고 최소한의 짐을 지고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까먹으며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좀머씨 이야기’에 나오는 좀머씨같이 걷고 또 걸으며….
사천왕사 휴게소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필자가 성덕태자 묻힌 예복사에 갈 예정이라고 하니 우정 알 만한 사람들을 찾아 여기저기 물어봐 주기까지 하셨다. 옆의 아저씨가 잘 모르자 휴게소안내 자원봉사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 지도까지 그려주게 하셨다. 젊을 때 필자는 일명 시아버짓감들에게 제법 인기가 좋았는데 나이 드니 할머니한테 인기가 폭발이다. 일본에선 말벗해주는 문화가 없어서 그런가…. 우리나라에서는 전철 옆자리에만 앉아도 수십 년 만난 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데 말이다.
《일본서기》에 보면 소가 씨와 모노노베 씨의 전투에서 소가 씨에 가담했던 쇼토쿠 태자가 “승리하게 해주시면 사천왕을 안치할 사원을 짓겠다”는 서원을 세웠고, 실제로 전투에서 이긴 뒤에 셋쓰의 나니와에 스이코 천황 원년인 593년에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덕태자의 전성기를 구가한 이 절을 뒤로하고 이제 그가 잠든 예복사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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