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영화 속의 직과 업] 권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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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4-02 16:00 조회3,907회 댓글0건본문
영화 <챔피언>의 김득구는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은 권투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똑같이 두 팔로 하는 거고, 나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거든. 남들 열 번 뻗을 때, 응, 난 열다섯 번 스무 번 뻗으면 되는 거거든.” 김득구는 권투 선수가 되기 전 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신문배달원, 중국집 배달원, 빵공장 종업원, 구두닦이, 버스 안에서 볼펜장수 등등. 중졸의 가난한 강원도 청년이 1970년대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찾았던 직업의 리스트는 길다. 권투처럼 힘든 스포츠를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것에서 거꾸로 김득구가 마주 했던 현실의 고단함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론 권투라는 직업의 핵심을 알아채고 멋진 비유로 요약하는 데서, 김득구가 평소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지고 굉장히 영리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국제규격의 링을 구경했을 때 깜짝 놀랐다.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링에 올라보니 남자의 큰 걸음으로 10보를 걸을 수 없었다. 성인 남자 2명이 마주 서면 도망갈 곳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V에서 본 선수들이 겅중겅중 뛰어다닐 때 링은 축구장만큼 커보였는데, 그 모든 명승부들이 이렇게 좁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니, 충격이었다. 사각의 링을 두른 로프도 흥미로웠는데, 4줄짜리 로프는 벽의 기능을 하고 있지만, 선수가 로프에 기대면 반동으로 다시 링으로 돌려보낸다. 로프의 탄성은 가혹하다. 얻어맞고 지친 선수를 그의 물러나는 속도와 체중에 비례하여 다시 중심으로 튕겨낸다.
교체 선수 없는 1인 종목, 좁은 링과 지친 선수를 끊임없이 가운데로 몰아내는 로프, 선수가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의 신체능력 뿐. 이런 가혹한 조건은 권투를 인생의 희로애락이 결집되는 상징으로 만든다. 그래서 영화계는 이 좋은 소재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어왔다. 명작이 수두룩한 권투영화 리스트 중에 어떤 영화를 소개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리스트를 반복해서 검토하면서 권투영화에는 유난히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 칼럼은 권투영화를 실화와 픽션으로 나누고, 양 분야의 대표작을 비교 소개하겠다.
먼저 실화 쪽부터 보자. 가난하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청년들이 링의 안팎에서 세상과 격투했다. <신데렐라맨>의 제임스 J 브래독은 1930년대 대공황기의 미국에서 싸웠고, <알리>의 무하마드 알리는 극심한 흑백갈등을 겪던 1960-70년대 미국에서 싸웠다. <분노의 주먹>의 제이크 라모타는 뉴욕의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1940년대 내내 싸웠고, <파이터>의 미키 워드는 성공과 슬럼프를 번갈아 겪으면서 1990년대에 명승부를 남겼다. 1982년 라스베가스 특별링에서 잊지 못할 경기를 남긴 김득구의 이야기는 두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울지않는 호랑이>(1984년)와 <챔피언>(2002). 이계인과 유오성이 김득구를 연기했다.
실화 쪽 영화들은 경기장면보다 링 밖의 이야기, 숨겨진 이야기들을 즐겨 탐색한다. 명성 높은 실존인물들이 링에서 보여준 모습보다 링에서 내려온 다음 혹은 링을 떠난 후의 모습을 다룬다. 화려한 조명 아래, 링에서는 챔피언이었던 이들도 링 바깥에서 만난 적에겐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적은 조바심, 오만, 부 富 , 유혹, 의심 같은 것들이다. 링에서 천하무적이었던 이들이 링 바깥의 적들에게 무너지는 모습은 쓸쓸하다. 챔피언들이 현실에서 만난 적들에 비하면 역시 링은 공평한 장소였고, 권투는 정직한 일이었다.
<분노의 주먹>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술집을 겸한 극장의 출연자 대기실이다. 은퇴한 챔피언 라모타는 이제 뚱뚱한 중년의 사회자가 되었다. 그는 거울 앞에 앉아 오늘 손님들 앞에서 말할 농담을 연습한다.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와 공연까지 5분 남았다고 말하면, 그는 “손님은 많아?”’라고 묻는다. “많이들 왔어”라는 답을 남기고 직원은 사라진다. (여기서 직원 연기를 하는 사람은 감독 마틴 스콜세지다) 라모타는 공연을 앞두고 긴장됐던 것일까? 그는 거울 앞에서 복장을 세심하게 손본 뒤 일어선다. 그리고 주먹을 쥐고 기합소리를 내며 쉐도우 복싱을 한다. 마치 옛날 챔피언의 자격으로 링에 오를 때처럼. 하지만 상대가 벌벌 떨던 그 스피드는 아니다. 뚱뚱해진 그의 팔은 상대의 얼굴에 닿지도 않을 것 같다. 초조한 듯 대기실을 오가며 쉐도우복싱을 하는 그를 카메라는 따라가지 않는다. 담담히 대기실의 거울만 비추고 있어, 라모타는 화면 좌우로 오가며 잠깐씩 모습이 사라진다. 이윽고 라모타가 대기실 문 쪽으로 걸어간 뒤, 다시 한번 자신을 격려하는 기합소리를 내면 장면이 어두워진다. 영화 개봉 당시는 로버트 드 니로의 20kg이 넘는 체중변화가 화제가 되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연기는 모든 장면에서 빛이 난다. 권투선수로서 가장 성공했을 때조차 불안과 의심에 시달렸고, 자신을 아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제이크 라모타. 이 영화는 실존했던 권투선수의 링 밖의 인생을 정직하면서도 시적으로표현했다. 권투 장면은 일반 액션 연기보다 난이도가 높다. 배우가 직접 맞지 않으면 실제 분위기를 내기 어렵다. 권투선수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현실의 선수들이 느꼈던 가혹한 링의 법칙을 동일하게 적용받는다. 하지만 연기의 난이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배우들이 권투선수 역을 꿈꾼다. 로버트 드 니로같은 명배우들이 권투선수 연기를 통해 찬란한 이력을 만든 것도 후배 배우들의 도전을 부추긴다. 하지만 권투선수 연기는 엄청난 부담이다. 선수처럼 몸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가장 근원적인 어려움은 얻어맞는 연기에 있다. 권투 장면을 실감 나게 하는 것은 때리는 것보단 맞는 장면에 달려있다. 사실 모든 액션 장면은 맞는 쪽이 얼마나 잘 맞아주느냐가 포인트다. 때리는 쪽이 강해 보이려면 맞는 쪽이 잘 해야한다. 홍콩의 위대한 무술 연기자들, 성룡, 이연걸, 견자단 등은 본인의 무술도 대단하지만, 그들의 주먹과 발차기에 맞아주는 동료 연기자들과 함께 발전한 것이다.
이제 실화의 반대편, 픽션인 권투영화 쪽으로 가보자. 권투영화 중 가장 큰 돈을 번 영화가 이쪽에 있다. 실베스터 스텔론의 <록키>. 실베스터 스텔론은 <록키>의 대본을 직접 썼는데, 영웅적 서사 속 여기저기에 진심이 느껴지는 현실을 많이 심었다. 뻔한 이야기로 추락할 수도 있는 줄거리를 구해내는 글솜씨가 훌륭하다. 아마 백미는 역시 엔딩일 것이다. 그토록 치열한 주인공의 도전이 패배로 끝나는 영화라니! <록키>는 말한다. 남자의 승리는 시합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는 것이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같은 말을 듣는 것이다. 인생을 헛되이 보낸 자가 각성하여 한 번의 기회에 목숨을 거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새벽에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뛰어오르는 스텔론의 모습은 미국의 아이콘이되었다. 그리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가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32살 여자복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메인 스튜디오들은 투자를 꺼려했다. 21세기 벽두에 권투영화는 한물간 장르였고, 더구나 주인공이 여자 복서라는 것도 감점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가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4관왕이 되었을 때보다, 흥행수익으로 제작비의 10배를 벌어들인 것이 더 통쾌했다. 이 놀라운 영화는 권투에 대한 잠언이 가득한데, 그것은 평생을 권투코치로 살았던 원작자 FX Toole의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15년 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아 원작 소설을 아마존으로 구매했다. 책은 배를 타고 한달 후에 집으로 배달되었다. 사전을 펴놓고 소설을 천천히 읽어가며, 인상적인 문장이 나올 때마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쳤다. 그 중 하나만 소개하면, “권투는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야. 모든 게 거꾸로 되어있기 때문이지. 네가 왼쪽으로 움직이고 싶으면 너는 왼발로 스탭을 밟으면 안돼. 너는 오른발의 발가락부터 움직여야 하지. 네가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너는 왼쪽 발가락부터 써야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에,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러지. 권투선수는 반대로 고통 안으로 스탭을 밟고 들어가는거야.”
마무리를 위해 1977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가보자. 실베스터 스텔론이 여우조연상을 발표하기 위해 단상에 있었는데, 그의 등 뒤로 거구의 흑인남자가 살금살금 나비처럼 다가온다. 스텔론이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등 뒤를 쳐다보더니 깜짝 놀란다. 그의 눈 앞에는 무하마드 알리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즉석에서 간단한 스파링을 벌인 뒤, 웃으며 서로를 포옹한다. 알리와 록키의 스파링이라니! 권투영화의 실화와 픽션 양 쪽의 주인공들이 만난 것이다. 스텔론 은 <록키>를 쓸 때, 록키가 상대하는 챔피언 아폴론 캐릭터를 알리를 모델로 썼고, 알리는 <록키>를 좋은 영화라고 칭찬했었다. 가끔은 아카데미 시상식의 이런 깜짝쇼가 정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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