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정진원의 세계여행] 남인도 오로빌 공동체로 가서 살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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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10-01 10:35 조회2,879회 댓글0건본문
1989년 여행자유화 원조 세대인 필자는 30년 남짓 세계를 여행을 하는 동안 여생을 보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생겼다. 그중 한 곳인 남인도 오로빌을 생각하면 지금도 꿈만 같다. 20여 년 전인 90년대 중반 어느 날 전세계인의 공동체를 표방하는 ‘오로빌’에 대한 기사를 접하였다. 무작정 그곳으로 마음이 달려갔다. 언젠가 가서 살아보리라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도 겨울 IMF 사건이 터져 외환 달러가 2배 이상 올라 유럽여행을 접은 제자와 불교 공부를 같이 하는 한선생님 그렇게 셋이 같은 외국이지만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남인도행을 결정하게 된것이다. 마침 서강대에 인도철학을 강의하러 온 조지신부님을 만나 그의 고향인 께랄라 주가 추가되었지만 나의 목표는 오로빌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첸나이이지만 그때는 마드라스라고 불렸던 곳에서 오로빌은 130킬로정도 떨어진 바닷가에 있었다. 우리는 남인도 보다는 불교성지 인도동북지역을 많이 가는 경향이 있는데 당시 한국인 인지도는 어떠했겠는가. 남인도 힌두교 사원을 들어가려면 힌두교여야만 했는데 내가 힌두교도라고 우기면 어디 티벳이나 네팔에서 온 소수부족인 줄 알고 순순히 들여보내주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새벽에 생소한 마드라스 공항에 내린 우리는 무섭기도 하고 어정쩡한 시간이라 하루를 공항에서 지새우고 호텔을 잡았다.
인도 첸나이에서의 신고식 그러나 남인도에서의 신고식은 결코 간단치 않았으니 우리는 피곤에 절어 부랴부랴 중급 호텔을 잡고 트윈 침대에서 셋이 자게 되었다. 가장 불편한 가운데 자리는 솔선수범이 모토인 동행 한선생님이 자원해 선점하고 우리는 양쪽 가장자리에 누워 미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자다가 보니 제자 근영이가 갑자기 부스럭거린다. 무슨 일인가하니 자꾸 모기가 문다면서 모기약을 찾는다는 것이다. 모기 소리도 안 나는데 무슨 모기? 긴 여정과 공항에서 밤샘한 여독으로 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대망의 이튿날 아침, 일어나고 보니 불편한 침대 가운데 자리 선생님만 멀쩡하고 왼쪽에 잠든 나는 왼쪽 반신이, 제자 근영이는 오른쪽 반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빈대에 물려 퉁퉁 부어 있었다. 가렵고 아픈 것도 잊고 우리는 셋이서 포복절도를 하며 서로를 쳐다 보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착한 마음을 낸 한선생을 위하여 우리가 보디가드 노릇을 하며 빈대 군단 철통 방어를 한 셈이었다. 우리는 일주일 넘게 피가 나도록 북북 긁으며 다녀야 했다. 지금도 난생 처음 만난 빈대, 벼룩 공격을 모기라 굳게 믿고 아무짝에 쓸모없는 모기약으로 박멸에 여념 없던 근영이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 ‘어서와, 빈대 천국 인도는 처음이지’….
오로빌의 역사 오로빌은 타밀나두 주 첸나이에서 3시간 정도 걸리는 퐁디 셰리라는 곳에 있다. 스리 오로빈도라는 수행자가 세워 그의 이름을 따서 ‘오로Auro+빌리지village’에서 오로빌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찾아보니 오로빌이라는 이름은 '동트는 새벽(프랑스어 aurore에서 따온 단어인 Auro)의 도시(ville)'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인도의 사상가 스리 오로빈도의 이상향을 구현하기 위해 1968년 세워졌다. 1988년 인도 국회에서 오로빌 재단법이 통과되면서 오로빌은 특별자치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오로빌의 주민은 오로빌리언으로 부른다.
그 당시 프랑스 68혁명이 일어난 시기라서 ‘인류 화합(Human Unity)과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오로빌의 가치에 공감한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들어 만들었다고 한다. 2019년 현재 50여 개국 3천 명 정도 살고 있고 한국인은 35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인이 제일 많으며 그 다음으로 프랑스, 독일 그 밖에 전 세계인들이 소수 자리잡고 있다. 어쨌든 이 세상의 인류화합과 평화를 지향하는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친환경 채식을 위주로 하며 자급자족을 목표로 물물교환을 하며 살아간다니 정말 기적같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 가서 몇 년이라도 살아보고 싶다. 물론 거기도 사람사는 곳이니 희노애락이 왜 없으랴만….
오로빌의 자전거와 오토바이에 대한 단상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오로빌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자동차가 없는 곳, 자전거나 기껏해야 스쿠터가 전부였다. 그러나 인도가 어떤 곳인가. 겨울에도 더운 곳이다. 심지어 남인도이다. 오로빌 안에서도 걸어서 모든 곳을 다닐 수가 없다. 필자는 더군다나 극심한 몸치이다. 몸으로 하는 것을 전부 못한다. 그러니 자전거라고 잘 탈 수 있을까. 운전면허가 있으니 스쿠터를 연습해서 타보자하고 대여하러 갔더니 스쿠터는 없다. 하는 수 없이 자전거를 대여해서 어떻게든 타보려고 하니 이번에는 안장이 높다. 인도 사람들이 키가 비슷해도 우리보다 하체가 훨씬 길다는 것을 알게 된 에피소드. 이렇게 글로는 몰랐던 사소한 현지 경험 한 가지에서도 배우는 문화의 다양성이라니…. 직접 부딪쳐야만 알 수 있는 ‘알쓸신잡’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제 자전거를 연습해서 타고 오로빌 한 바퀴를 돌아볼까. 필자는 자전거를 출발도 누가 잡아줘야 하고 내릴 때도 누가 도와줘야 한다. 그러니까 달릴줄만 아는 것이다. 일단 나를 도와 첫 번째로 출발시키고 두 사람은 뒤따라오기로 하였다. 필자는 자전거도 못타는데 그들이 앞서가면 큰일이다 싶어 죽기 살기로 타자마자 페달을 밟았다. 나중에 일행이 하는 말, “어찌나 빠르던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며 자전거 못 탄다는 것 맞나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전거길을 달렸는지 모른다. 또 뒤를 돌아볼 실력도 못되니 앞만 보고 20~30분쯤 달렸을 때 저 멀리 자동차가 나타났다. 아뿔싸. 나는 설 줄을 모르지 않던가. 이러다가는 충돌이다. 에라 모르겠다. 차라리 넘어지자. 우당탕 넘어지니 자동차가 섰다. 아마 내가 계속 갔으면 자동차는 내가 피할 줄 알았을 것이다. 다행히 흙길이라 그리 다치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여행은 이토록 결사적이었다.
사실 이 못타는 자전거 실력으로 필자는 90년대 초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 돌 많은 정원도 돌아다녔고 일본 ‘아스카’ 지역도 일주를 했다. 아스카에서는 전봇대와 부딪혀 타박상에 무릎이 피가 철철 나는 등 죽을 뻔한 것도 잊은 채 빌린 자전거가 고장 나 근처 자동차 정비소에 천신만고 끝에 끌고 가 고친 기억도 새롭다. 이제는 다시 못할 ‘무식하면 용감한’ 자전거 여행이었다.
오로빌에서 외계인만큼 신기한 한국인 그렇게 해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선 당시 오로빌에서 두 명의 한국인을 만났던 것이 생각난다. 북인도에서 기차를 25시간인가 타고 내려온 이승하라는 청년이 비지터 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오로빌 주민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가 북인도 사람들은 강팍하고 좀도둑이 많아 늘 긴장 상태였는데 남으로 내려올수록 인상이 선해지고 인심도 좋고 날씨도 좋아 극과 극의 체험에 놀랐다는 이야기를 하며 기후가 온화하고 먹거리가 풍부해서 그런 모양이라고 하였다. 필자도 동의하는 바였다.
또 한편 그곳에는 한국여성이 외국 남성과 결혼해 아이 셋과 살고 있었는데 우리를 만나러 올 때에는 오토바이 한 대에 다섯 식구가 모두 타고 와서 정말 신기하였다. 어른 사이에 둘 그리고 아빠 앞에 타고 온 큰 아이가 천연덕스럽게 내려서 위험하지 않냐고 물으니 여기서는 속도 낼 일이 없어 위험하지 않고 이것이 우리 자가용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우리는 아마 그녀에게 환전을 했던 것 같다. 세계 어디서나 당당하고 씩씩한 한국 여인을 만나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필자도 남인도 사람들이 신기했지만 그들도 우리가 신기하기는 마찬가지. 지구 어느 나라보다 호기심 천국인 인도 사람들의 대놓고 사람 구경하기는 가히 기네스북감이다. 그 고립무원의 오로빌에서 만난 두 한국인은 혈연보다 반갑고 오래오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도 잘 살고 있기를, 안녕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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