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영화 속의 직과 업] 건축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10-01 13:54 조회2,684회 댓글0건본문
스위스 지폐는 아이들 장난감 같다. 일단 재질이 종이가 아닌 폴리머여서 부드러운 플라스틱같고, 색깔이 밝고 화사하다. 부루마블같은 보드게임에서 사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예쁜 지폐인데, 디자인이 우리와 달리 세로방향이고, 지폐 속 인물의 얼굴이 지폐의 절반을 큼지막히 차지한다. 가장 낮은 단위인 10프랑의 인물은 르 코르뷔지에, 20세기 프랑스의 건축가이다. 몇백년 전 역사 속 위인들이 박혀있는 지폐에 익숙한 내겐 ‘20세기’도 ‘건축가’도 모두 낯설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의식주>라고 치면, 건축가는 그중 하나를 담당하는 직업이 아닌가! 특히나 20세기는 건축가들이 다른 어떤 시대보다 활약할 공간이 많았던 시대였고, 수많은 건축가들은 공동으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 어쩌면 건축가가 지폐에 등장하는 건 스위스가 처음일 뿐, 앞으로 여러 나라가 따라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건축가들은 어떤 모습일까?
2 건축가가 나오는 영화 중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역시 <건축학개론>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35살의 현장건축가 승민. 그는 위로 대표와 부장을 모시고 매일 전쟁같은 업무를 처리하는 실무진이다. 연일 이어지는 야근에 사무실 책상에서 잠드는 날도 잦고, 얼굴엔 피곤이, 말투엔 짜증이 묻어있다. 아직 자신이 책임자가 되어 집을 설계한 적은 없으며, 회사 내에서 진급 전망도 그저 그렇다. 엄태웅이 연기한 승민 역은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아니지만,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캐릭터이다. 어느 조직이나 왜 그런 친구들 있지 않은가. 뭘 시켜도 작은 반대를 끼워넣어 대화가 까다로운 친구들. 예민하고 자기 고집이 강해 협업이 힘들지만, 그만큼 인생에 진지하고 성실해서 믿음이 가는 사람들 말이다.
사실 어느 직종이나 30대 중반은 혼란스러운 시기이다. 유명 건축가들의 이력을 보면 30대 중반은 자기 이름을 걸고 독립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독립선언은 결국 평생의 업으로 이어진다. 죽을 때까지 할 일을 결정할 시기인 것이다. 한편으론 아직은 인생의 다른 길도 열려있다. 여러 가능성들이 유혹하는 이 나이 대의 흔들리는 직장인에 엄태웅은 잘 어울린다. <건축학개론>은 집짓기와 연애가 닮았다고 말한다. 사실 건축가의 일은 굉장히 특이한데, 요구받는 모든 추상적인 요소들을 아주 구체적인 매스로 표현해야한다. 만약 의뢰인이 ‘저녁에 들어가면 일기쓰고 싶어지는 방’을 요구하면, 이 추상적인 언어를 창과 문이 있는 현실공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으며 수많은 오해와 착각들이 가로막고 있다. 연애도 그렇다.
집(house)을 짓는 사람들은 행복한 집(home)을 꿈꾼다. 하지만 모든 집(house)이 행복한 집(home)은 아니다. 스무살의 승민은 첫사랑 서연을 위한 집을 모형으로 만들지만, 오해가 끼어들어 전달하지 못한다. 15년 후 승민은 다시 서연을 위한 집짓기의 기회를 얻고, 집을 지어주지만 그 집에는 서연 혼자 남는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건, 어설프게 두 사람을 한 집에 살게하지 않고, 서로의 처지를 인정하고 헤어지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엇갈리는 인연은 씁쓸하지만 그래서 더욱 찬란한 젊은 날이랄까, 아무리 현실이 비참해도 <개론>수업과 첫사랑이 있던 시절은 영원히 아름다운 것이다. 한편 이 영화는 건축밥을 먹는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감독 자신이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나와서 건축하는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디테일이 좋았던 것 같다. 재밌는 것은 영화의 삽입곡인 <기억의 습작>을 부른 김동률도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다녔다는 것이다.
3 집짓기라는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가 하나 더 있다. 미타니 코키 감독의 <모두의 집>. 미타키 코키 감독은 코미디 장르의 강자다. 국경을 넘기 어렵다는 코미디 장르지만, 그의 작품들은 한국에서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웃음의 대학>은 대학로 연극무대의 단골메뉴이고,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숨은 팬이 많다. 미타니 감독은 1명의 주인공보다 여러 명의 집단주인공들이 시끌시끌하게 이야기를 끌고가는 편을 선호하는데, <모두의 집>도 그렇다.
한 부부가 평생의 꿈이었던 단독주택을 짓기로 마음먹는다. 그들은 심사숙고 끝에 인테리어업계의 떠오르는 스타 야나기사와를 건축가로 선택하고 설계를 의뢰한다. 동시에 시공 쪽은 부인의 아버지가 맡기로 한다. 장인은 평생을 건축현장에서 보낸 베테랑 기술자로 현재는 은퇴한 상태이다. 그는 딸의 집을 짓는다는 것에 들떠 예전 동료들을 불러모은다. 문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이미 죽은 자도 있고, 호출에 응한 자들은 귀가 안들려 동문서답하는 노인이 되었다는 것. 건축가는 개방적이고 모던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집을 지으려 하고, 장인은 평생 해온 것처럼 일본의 전통건축을 도입하려 한다. 설계와 시공의 충돌은 점점 격렬해지고, 사방에서 집짓기에 대한 훈수가 시작된다. 오래 보지못한 친척이 나타나 풍수지리를 운운하며 집 앞에 분수를 놔야한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나중엔 부부마저 의견이 충돌하여 집짓기로 인해 집안이 산산조각난다.
코메디 특유의 과장이 있지만, <모두의 집>은 집짓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하지만 중구난방으로 달려가던 혼란이 가까스로 진정되고, 완성된 집이 모습을 드러낼 땐 보는 사람 마음도 환해진다. 젊은 설계자와 나이든 시공자는 모든 면에서 충돌했지만,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다. 목욕탕 타일 한 장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까다로움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두 남자가 언덕 위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자신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집을 바라보는데, 그들의 뒷모습이 개운하다.
4 이제 영화 속 건축가들을 본격적으로 한명씩 분석하겠다. 만약 내가 집을 짓는다면 어느 건축가에게 맡길까 상상해 보았다. <노크, 노크>의 키아누 리브스는 아름다운 아내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중견 건축가이다. 휴가철 가족여행을 계획했으나 급한 업무가 생기자 혼자 남는다. 비오는 밤, 키아누 리브스는 모니터 앞에 앉아 성실하게 다른 사람의 주택을 설계한다. 아이들이 있는 부부의 단독주택이 그의 전문분야일까? 그의 건축스타일은 그가 사는 집에 반영되었을 터, 그가 사는 집은 이렇다. 밝은 톤의 모던한 주택으로, 조각가인 아내의 작업실이 있고, 한참 크는 아이들 2명이 있어서인지 색감이 다양하고 소품이 엄청 많다. 영화의 줄거리상, 건축가 키아누 리브스는 엄청난 망신을 당하기 때문에 건축가로서 일을 다시 하기 어려울 듯 싶은데, 평판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기회를 주면 재기에 목숨을 걸고 오히려 열심히 할 것 같기도 하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톰 행크스는 시카고의 대형 건축사무소의 직원이다. 홀아비가 된 이후, 태평양 연안의 시애틀로 이사해 하우스보트에서 산다. 천장이 낮고 목재가 기본인 2층 집이다. 하지만 현관 바로 앞에서 바다가 출렁이는 집이라, 8세 아들이 살기에는 조금 위험한 환경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의 집은 청소와 관리가 잘 되어있는데도 어딘가 텅 빈 느낌이다. 아마도 감독이 여자의 손길이 없는 홀아비 느낌을 강조하느라 공간을 이렇게 디자인한 것 같다. 93년작이라 그가 일하는 책상엔 컴퓨터가 없고, 설계도면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그 후 혁명적으로 변한 디지털 사무환경에 이 남자는 잘 적응했을까? 아내의 죽음 이후 불면증에도 시달리는 이 남자에게 일생 한번 짓는 집을 맡기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아무리 사람 좋은 톰 행크스라 하더라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일하는 건축가가 또 있다. <어느 멋진 날>의 미셀 파이퍼가 일하는 사무실은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 있다. 그녀는 회사의 운명이 달린 대형빌딩 프로젝트의 책임설계를 맡고있다. 하지만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건 능력자인 그녀에게도 힘겹다. 아이의 장난에 힘들게 만든 모형이 망가지기도 하고, 엄마를 찾는 아이 때문에 클라이언트와 술자리를 거절해서 대표의 눈 밖에 나기도 한다. 은근히 까칠한 독설가로, 매사에 자기 주장이 강한 편이지만, 차분히 주변 사람의 사정을 배려할 줄도 알고, 힘든 순간일수록 솔직하게 처신한다. 개인적으론 이 사람이 가장 신뢰가는 건축가이다. 이 사람에게 설계를 맡기고 싶다.
5 건축가가 요구받는 능력은 참 많기도 하다. 상상력, 소통력, 직감, 인내, 마감력, 등등. 실제 건축가들의 생활이 궁금하신 분들은 다큐영화를 찾아보셔도 좋겠다. 정재은 감독의 <말하는 건축가>는 돌아가신 정기용 건축가가 주인공이다. 암판정을 받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인생과 건축에 충실하셨던 노 건축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한 후시하라 켄시 감독의 <인생 후르츠>는 한 건축가와 그의 부인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건축가의 명언 3가지가 소개되는데, 그 중 하나는 르 코르뷔지에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저작권자 © 맑은소리맑은나라,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