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영화 속의 직과 업]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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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8-16 15:03 조회3,128회 댓글0건본문
눈보다 귀가 행복한 영화들이 있다. 영화를 보고나면 귓가에 멜로디가 남아서 OST를 찾게되는 영화들, 우리는 그런 영화들을 음악영화라고 부른다. 뮤지컬영화처럼 아예 스토리를 노래로 이어나가는 영화들도 있지만, 오늘은 주인공이 가수이거나, 가수가 꿈인 사람들의 영화로 시야를 좁히자. 가수가 주인공인 영화들의 리스트를 써보니, 일단 크게 2가지로 영화들을 나눌 수 있었다. 한쪽은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영화들이고, 다른 한쪽은 픽션으로 가수의 세계를 다룬 것들이다. 우선 전기영화들부터 이야기할까?
세상엔 찬란히 빛나는 가수들이 너무나 많기에, 이 리스트는 길다. 거의 음악장르별로 몇 명씩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리스트를 적어보니 새삼 나의 음악취향이 편식이 심한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리스트의 절반이 록음악의 스타들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이런 반론도 고개를 든다. 록음악인들의 영화가 많은 것은 그만큼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극적인 인생을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2 가장 최근에 많은 분들이 사랑한 록음악인의 영화는 <보헤미안 랩소디>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믿기 힘든 가창력으로 명곡을 자유자재로 쏟아낸 천재 퍼포머이다. 워낙 극적인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라 영화소재론 충분하지만, 개인적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영화를 그의 고향인 영국사람들보다 더 많이 볼 줄은 몰랐다. 통계에 의하면 이 영화를 본 한국인은 9,948,386명. 내 주변에도 이 영화를 2번씩 본 사람들이 수두룩하며, 생판 모르는 다른 관객들과 떼창을 하면서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한국의 영화관을 인도의 영화관처럼 만든 이 영화는 음악영화만 줄 수 있는 감동을 잘 보여준다. 관객에게 마치 퀸의 콘서트장에 초대된 것 같은 경험을 준 것이다.
가수는 무대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예전에 우연히 가수와 배우를 겸하는 연예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배우와 가수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아봤다면서 준비된 대답을 말했다. “초심은 배우에 있지만, 가수활동을 할 때 더 만족스럽습니다. 연기를 할 때는 외로워요. 촬영현장에선 늘 이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 지를 확인할 때까진 많이 기다려야 하죠. 하지만 가수는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 바로 반응이 옵니다. 노래를 들어주는 분들과 한 공간에서 하나가 되는 경험은 정말 끝내주죠.” 아하, 그렇구나. 무엇보다 가수는 피드백이 빠른 직업이었다.
3 록음악인이 나오는 영화들을 2편만 더 소개하고 싶다. <열정의 로큰롤> (짐 맥브라이드 감독, 데니스 퀘이드 주연)과 <도어즈>(올리버 스톤 감독, 발 킬머 주연)가 그 2편이다. <열정의 로큰롤>은 한때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유명했던 가수, 제리 리 루이스의 영광과 추락을 그렸다. 이 영화에서 데니스 퀘이드가 보여주는 피아노 연주는 정말 놀랍다. 실제 당대의 다른 뮤지션들로부터 도대체 저 녀석은 어떻게 저런 연주를 할 수 있냐고 질투를 받았던 제리 리 루이스의 연주를 데니스 퀘이드는 잘 재현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젊은 주인공들의 아버지 역할을 주로 맡는 배우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주위에 내뿜는 존재였다.
그리고 <도어즈>는 동명의 밴드를 이끌었던 짐 모리슨의 전기영화이다. 도어즈의 노래는 몽환적인 사운드에 시적인 가사가 얹혀있는데, 듣고있으면 꿈을 꾸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칼에 찔린 것처럼 생생하다. 뚱뚱해지기 전의 발 킬머가 기행을 일삼던 짐 모리슨의 인생을 잘 표현했다.
이제 록음악을 벗어나보자. 다른 음악장르의 가수들이 나오는 영화는 이렇다. <레이> 테일러 핵포드 감독, 제이미 폭스 주연. (장르:블루스와 R&B) <앙코르> 제임스 맨골드 감독, 호아킨 피닉스 주연. (장르:컨트리) <8마일> 커티스 핸슨 감독, 에미넴 주연. (장르:힙합)
위의 영화들은 장르는 각각 다르지만, 영화의 중요순간마다 나오는 공연 장면들이 대단한 것은 공통이다. 영화 속에서 공연을 재연하는 배우들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편집의 힘을 빌린다해도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주솜씨와 가창력은 인상적이다. 배우들은 높은 연기 난이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그들에게 연주는 쉬워보인다. <앙코르>의 감독 제임스 맨골드는 조니 캐쉬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에 대해 이런 일화를 들려준다. <사실 걱정이 많았습니다. 조니 캐쉬와 달리 호아킨은 목소리가 얇아요. 노래는 더빙하면 되지만, 대사가 문제였습니다. 거칠고 남성적인 조니 캐쉬의 목소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었죠. 그런데 첫 촬영 때, 호아킨이 리허설을 하는데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어요. 조니 캐쉬의 거친 저음이 호아킨의 입에서 나오는데, 그것 참.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노래도 전부 호아킨이 직접 부르게했죠.> 이쯤되면 이건 연기가 아니라 마법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가수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각종 영화제의 주연상 후보에 당연한 듯 오른다. 그들 중 <보헤미안 랩소디>의 레미 말릭과 <레이>의 제이미 폭스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앙코르>의 호아킨 피닉스는 골든글로브 주연상을 받았다.
4 자, 이제 픽션의 세계로 가자. 이쪽 영화에선 가수들의 노래보다 인생에 방점이 찍혀있고, 무대에서 내려온 가수의 삶을 더 많이 보여준다. 영화들이 보여주는 가수의 세계는 무섭다. 이 세계에선 노력보다 재능이 우대받고, 직업적 승부가 어린 나이에 달려있다. 3~40대는 물론, 20대 후반만 되어도 데뷔에 늦은 나이다. 또한 성공으로 가는 길엔 수없이 많은 실패자의 주검이 널려있다. 성공확률이 낮은 세계이다.
그래서인지 무명의 위치에서 이름을 얻기위해 노력하는 가수 지망생들의 이야기가 자주 만들어졌다. <코요테 어글리>(데이빗 맥낼리 감독)는 뻔한 성공담이지만, 디테일이 좋아서 기분좋게 주인공을 응원할 수 있는 영화다. 무대공포증을 앓는 가수 지망생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장애를 극복하는 것을 보는 일은 흐뭇하고, 칵테일바에서 벌어지는 즉석공연들은 활기가 넘친다. 존 굿맨이 연기한 가수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부정도 멋지다. 기분이 우울할 때 이 영화를 보면 힘이 난다.
<원스>(존 카니 감독)는 남녀주인공을 실제 가수들이 연기했는데,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두 사람은 내한공연도 2번이나 했는데, 처음 올 때는 연인 사이였으나, 2번째 공연 때는 헤어진 관계였다. 한국공연을 위해서 다시 임시로 뭉쳤다고 한다. <코요테 어글리>가 어깨가 들썩들썩한 20대의 이야기라면, <원스>는 차분하고 쓸쓸한 분위기의 30대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도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가수로 도전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가기로 한 가수는 낡은 집에 혼자 남게되는 늙은 아버지를 걱정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떠나는 아들을 되려 격려한다. 이 장면에서 드러난 아일랜드 노부老父의 소박한 태도와 정갈한 지혜는 정말 기품있었다.
<라디오스타>(이준익 감독)의 주인공은 전성기가 지난 록스타이다. 그는 나이가 들었지만 성격과 세계인식은 아직도 인기많았던 청춘에 머물러있다. 이 영화는 박중훈이란 시대를 풍미한 명배우의 배우이력과 캐릭터가 겹쳐보이며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다른 어떤 배우도 박중훈처럼 할 수는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야말로 적역이란 이런 것. 가수에게 은퇴는 언제일까? 흔히 정년이 없는 직업이라 말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은퇴를 결정하는 건 대중일지도 모른다. 대중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며 늙어가는 가수의 외로움이 이 영화에는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영화는 <사랑의 행로>(스티브 클로브스 감독)이다. 이 영화엔 매일 노동하듯 공연하는 사람들의 피곤함과 자부심이 함께 스며있다. 가수 김광석이 생전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기도 했었다. 소극장 공연만 1000회 이상 했던 김광석이기에, 다른 사람과 다른 깊이로 이 영화를 느꼈던 것 같다. 피아노 위에서 노래부르는 미셀 파이퍼의 모습은 언제 봐도 근사하다.
매년 8월에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열린다. 지난 14년 동안 꾸준히 좋은 영화들이 소개되었고, 영화제 기간 동안 열리는 콘서트에는 유명가수들이 많이 온다. <원스>의 여주인공이 온 적도 있다. 독자분들이 피서 계획을 세우실 때, 제천을 선택하셔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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