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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영화 속의 직과 업] 웨이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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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7-24 12:51 조회3,1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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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생 때 방학이면 카페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사장님이 아주 좋은 분이어서 일을 잘하고 싶었지만 특별한 재주가 없었던 나는 작은 일들에서 방법을 찾았다. 15분 먼저 출근하기. 바닥청소 한 번 더하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중엔 정말 사소한 것도 있었다. 단골 손님들 중 두어 분이 왼손잡이라는 걸 발견하고, 그 분들한테 커피를 낼 땐, 찻잔의 손잡이를 왼손에 맞추어 드렸다. 그걸 알아준 분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전해졌는지 가게를 그만둘 때까지 손님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 때의 짧은 알바 경험 때문에 영화 속에서 웨이트리스를 발견하면 반갑다. 한편으론 마치 스스로가 엄청난 요식업 전문가가 된 것처럼 폼을 잡고 웨이트리스의 동작을 평가하거나 가게의 매상을 맞춰보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웨이트리스는 단역으로 많이 등장한다. 대개 주인공들이 연기하는 동안, 조심스레 다가와서 주문을 받거나 커피를 리필해주곤 사라진다. 얼굴이 노출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대사가 없는 경우도 태반이다. 그래도 영화 촬영현장에서 웨이트리스는 손님 역보다 난이도가 높기에 대접받는다. 손님 역은 가만히 앉아있으면 되지만, 웨이트리스는 움직여야하기 때문이다. 몇 억짜리 주연 배우들이 연기하는데, 단역의 실수로 장면이 지연되면 엄청 손해이다. 그래서 웨이트리스만은 대사가 없더라도 연기자사무실에서 온 전문배우들이 주로 한다.

 

2>     1991년에 만들어진 <프랭키와 쟈니>부터 이야기해보자. 이 영화는 <귀여운 여인>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게리 마샬 감독이 뉴욕 연극무대의 히트작을 각색하여 다시 한번 로맨틱 장르에 도전한 작품이다. 뉴욕의 작은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노처녀 웨이트리스와 막 감옥에서 출소한 중년의 요리사가 만나 사랑하는 줄거리다. 희곡이 원작인 작품답게 대사가 원체 좋은 데다, 훌륭한 배우들이 모였기 때문에 대화 장면들이 진수성찬이다. 이 영화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실없는 농담들, 느닷없는 지적질, 진상 손님들에 대한 불평 등이 쉴새없이 나온다. 영화를 보고나면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한 일년쯤 일한 착각이 든다.

 

웨이트리스를 연기하는 미셀 파이퍼를 보다 나도 모르게 공감한 장면이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게문을 닫기 직전, 미셀 파이퍼는 동료 알 파치노와 한담을 나눈다. 고단한 시간은 지나갔고, 스탭끼리만 남은 편한 시간이다. 내가 공감한 건 미셀 파이퍼의 말이 아니라 동작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다리를 길게 뻗어 앞에 놓인 의자 위에 걸쳐놓은 채 대화를 한다. 나도 손님이 없을 때엔 저런 식으로 의자를 사용해서 쉬곤 했다. 또한 미셀 파이퍼는 가게 사장이 들어오자 얼른 의자에 올려놨던 다리를 내려 자세를 바로하고 앉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면 속에서 헐리웃 스타는 사라지고, 주인 눈치를 보며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요식업 동료만 남았다.

 

이 영화엔 잊지 못할 장면이 또 있다. 미셀 파이퍼의 가게 동료 중에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 있었다. 모두가 바쁘게 일하던 어느 날, 가게 전화벨이 울리고, LA의 영화사가 그를 찾는다. 대본이 팔린 것이다. 그는 자취방에 전화를 놓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나빠서, 영화사로 대본을 보낼 때마다 연락처로 자신이 일하는 식당의 전화번호를 적어 넣은 것이다. 헐리우드는 엄청난 원고료와 함께 LA로 오는 비행기표를 약속한다. 청년은 펄쩍펄적 뛰며 기뻐하고, 매장으로 나와 방금 받은 소식을 손님들에게 자랑한다.

이때 꿈을 성취한 젊은 동료를 보는 미셀 파이퍼의 얼굴은 뭐랄까, 기꺼이 축하를 보내지만 어딘지 쓸쓸했다.

 

영화 속 미셀 파이퍼의 동료처럼 웨이트리스는 임시직인 경우가 많다. 꿈은 작가, 가수, 배우인데, 궤도에 오를 때까지 호구지책으로 일하는 것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힐러리 스웽크도 그랬다. 꿈은 권투선수지만, 당장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은 웨이트리스다. 형편이 힘든 그녀는 손님이 남긴 음식을 집으로 가져가서 저녁을 해결한다.

한번은 남이 먹다남긴 음식을 포장하는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손님과 마주치는데, 이 때 힐러리 스웽크는 거짓말을 한다. <우리 집 개한테 줄려구요> 링에서는 그토록 강한 그녀의 주먹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음식을 호일에 싸던 그녀의 손가락이 한없이 약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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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화 속 웨이트리스를 이야기할 때 빼먹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헬렌 헌트와 잭 니콜슨이 주연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이다. 두 연기자는 이 영화로 함께 아카데미 주연상을 쓸어갔는데, 이런 경우는 이후로 나오지 않고 있다. 헬렌은 맨하튼에 있는 식당에서 오랫동안 일한 베테랑 웨이트리스이지만, 버는 돈은 천식을 앓는 아들의 병원비로 다 나간다. 그녀의 아들은 생후 6개월부터 병을 앓았기에, 헬렌은 집 앞에서 의사번호판이 있는 차량만 발견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진상 손님에게도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는 그녀의 성품은 아픈 아들을 보살펴온 경험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를 뼈대만 추리면, 베테랑 웨이트리스와 진상손님의 사랑 이야기로 볼 수 있겠다.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진상손님은 무시무시하다.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면서 먼저 온 손님을 내쫓고, 식당의 식기가 더럽다며 집에서 가져온 플라스틱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한다. 또 입만 열면 독설을 쏟아내고, 사선이 있는 바닥은 걷지못한다. 이 진상노인이 웨이트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유명하다.

 

이것은 사랑 고백이지만, 동시에 웨이트리스란 직업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직선적이면서도 선량해요. 당신의 말 한마디에서도 그걸 알 수 있죠. 나는 식당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어떻게 음식을 나르는지, 어떻게 테이블을 치우는지 그들은 보고도 그 가치를 모릅니다. 지금 막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여자를 만났는데도 말이죠.>

 

4>     그러고보면 영화 속에서 웨이트리스를 사랑하게 된 남자들이 꽤 된다. <베이비 드라이버>(2017. 에드가 라이트감독)의 남자 주인공은 은행강도단의 일원이다. 그가 그 어두운 세계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는 것은 단골식당의 웨이트리스 릴리 제임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선남선녀의 러브스토리지만, 대본도 둘의 관계를 섬세하게 다룬다. 남자가 이 식당에 자주 오는 이유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자주 데리고 왔었기 때문이다. 그는 테이블에 앉으면 어린이 메뉴판을 먼저 보곤 하는데, 웨이트리스는 그런 그의 행동을 유심히 본다. 남자는 최고의 운전솜씨를 가진 드라이버이고, 여자는 긴 여행을 꿈꾸는 웨이트리스다. 음악을 매개로 두 사람의 인연은 멋지게 하나가 되고, 이어지는 장면들은 빠르고 아름답다.

 

<사이드웨이>(2004.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남자 주인공은 공사에 걸쳐 좌절을 겪는 교사이다. 그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는 사람은 웨이트리스 버지니아 매디슨이다. 인물간의 대화 장면이 많은 이 영화에서 버지니아 매디슨의 역은 조금 특별하다. 다른 배역들이 말을 많이 하거나 잘 한다면, 그녀는 잘 들어준다. 남자는 영혼없는 맞장구보단 솔직한 반응으로 자기 의견을 말하는 웨이트리스를 사랑하게 된다.

<몬스터 볼>(2001. 마크 포스터 감독)에선 존재감없는 남자 주인공에게 웨이트리스 할리 베리는 절절한 사랑이 되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1991. 낸시 사보카 감독)에선 해병대원이 전쟁터로 가기 직전의 시간을 함께 하는 연인이 웨이트리스였다. 급기야 <터미네이터>(제임스 카메룬 감독)에선 웨이트리스는 인류의 구원자 존 코너를 낳은 어머니가 된다.

 

5>     마지막으론 웨이트리스 배역을 조금 특별하게 사용한 영화를 소개한다. 줄리아 로버츠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주었던 <에린 브로코비치>. 주민 몰래 중금속을 유출하던 대기업과 맞선 한 여인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에서 감독은 재미있는 시도를 한다. 극 초반 은행잔고가 16달러였던 여자 주인공 에린은 집안의 식량이 다 떨어지자, 세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식당으로 간다. 에린은 아이들 것만 주문하고 자신의 것은 생략하는데, 주문을 받은 웨이트리스가 사정을 알겠다는 듯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이 웨이트리스를 연기한 사람이 바로 실제 에린 브로코비치이다. 가장 힘들던 시간, 아이들 것만 주문해야 했던 에린의 심정을 실제 에린보다 더 잘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한편 여기서 감독은 한번 더 재치를 부리는데, 웨이트리스의 유니폼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보면, <줄리아>라고 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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