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삼락자 석정스님의 전수제자 松堂 하경진 불화장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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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초대석 | 故 삼락자 석정스님의 전수제자 松堂 하경진 불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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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9-07-24 14:27 조회2,6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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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선주산방의 주인 석정스님이 전화를 걸어 와 물으셨다
.

요즘, 뭐 하고 지내나?!”

기도하고 있습니다. 스님.”

그럼 됐다. 선주산방으로 오너라.”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스승과 제자 인연의 출발이 되었다. 지난 2012년 스승 석정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까지 가장 지근거리에서 스승을 모시며 스승의 화풍을 닮아가던 송당 하경진 불화장이 들려준 스승 석정스님과의 인연을 풀어내는 대목이었다.

 

경남 하동에서 나고 자란 어린 경진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컸다. 손주를 금지옥엽처럼 생각하던 할머니의 손을 잡고 고향 인근 절에서 만난 법당 안의 황금 옷을 입은 부처님은 어린 소년에게 가장 큰 부자라고 여겨졌다.

그렇듯 부처님을 뵈며 느낀 소년에게의 소회는 참 부자절이다. ’라는 생각이었고 탱화를 접하면서의 감화라면 대체 누가 그렸을까? 이런 그림을.’이라는 의문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부산으로 이주해 와 청소년기를 고모댁에서 보낸 소년 경진에게 눈에 들어온 건 고종사촌 자형의 화필이었다. 석정스님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나름의 화필을 구가하던 고종사촌 자형은 그림에 소질이 있는 어린 사촌처남에게 불화를 접하게 해 준 최초 인연이기도 하였다. 사촌 자형은 다름 아닌 인법스님으로 환속해 불화에만 몰두하던 석정스님의 불화제자였다.

 

그 시절 약관의 나이를 갓 넘긴 경진은 부산 관음정사, 석남사, 성불사, 부산 불광사 등 석채를 쓴 석정스님의 불화에 참여하는 일만으로도 무진 無盡 의 법을 수하는 기분이었다. 당시 석정스님이 불사를 일궈낸 사찰로는 낙산사 원통보전, 향일암, 송광사 등 국내의 내로라는 하는 도량이 스님의 손을 거친 곳이었다.

바로 그즈음 이었나보다. 삶이란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스스로를 향상시키기도 하고 변곡점이 되기도 한다.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던 지금의 아내는 인법스님과 인연이 두터운 다른 스님과의 인연으로 인법스님의 불화작업을 거들게 되고 그곳에서 청년 경진을 만나게 되니 지어놓은 인연력이란 거스를 길이 없다는 생각이다. 화폭을 통해 한량없는 세계를 구가하는 둘은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이다.

신접살림이 시작된 곳은 다름 아닌 지금의 관음정사 인근 동네였다. 그곳에서 아내는 저녁마다 기도를 했고, 경진은 삼칠일 기도에 임했다. 하루 천배씩을 했나보다.

그때, 선주산방의 석정스님에게서 기별이 온 것이다.

뭐 하고 지내느냐는 물음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라는 답은 스승이 안으로 소원하던 답이었다. 그렇게 한걸음에 달려가 석정스님 문하에서 그림을 접하며 불화장으로서의 거목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제간의 인연이 부모자식 인연과 같다고 했던가. 아버지 같고, 할아버지 같고, 완전한 스승이었던 석정스님을 모시던 시절의 소회는 내 곁에 계신 부처님이었다.

불화는 신심만 있으면 할 수 있다.” 라며 선주산방에서의 첫 제자를 안아주신 석정스님은 늘 인자하신 어른이셨다. 선주산방에 도착해보니 7년 치의 작품이 밀려 있었다. 그만큼 함께 불화를 이끌 인물이 필요했고, 지금 생각해보니 전수자가 더 절실했을 때였다.

그러니 약관의 나이에 스님을 모시고 이 땅의 5대 보궁 순례를 가던 만행길도, 초파일이면 인연 있는 사찰들을 함께 다니며 초파일 등을 밝히는 일도 부처님 같은 어른 석정스님이 계셔 더 빛났고, 스승은 과묵하며 될 성 싶은 떡잎제자, 경진에게 송당松堂이라는 자호를 주며 곁에 둘 마음을 굳게 먹고 계셨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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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말, 스승 그늘에서 10년을 함께 하고 나니 그에게 불화장 전수조교 추천이 내려진 것이었다. 이미 그때로부터 5년 전이던 2005, 전통 불화 분야 단청장과 불화장을 분리하여 명실공히 한국의 불화장으로 지정을 받은 스승 석정스님인지라 5년이 되는 그 시점에서 반드시 후학을 전수제자로 지정을 해야 하는 시절이었기에 송당 하경진 화백에게는 천운을 거머쥐는 시절인연이 도래했던 것이다.

법의를 수한 관세음보살’, ‘구름 속의 용을 정해진 시간 내에 그려내는 작업으로 전수제자의 자격이 부여되는데, 스승의 화풍을 이어가고자 했던 송당 화백에게 돌아온 결과는 당당한 이름,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조교증서>였다.

세상을 얻은 듯 기쁘고 감사한 날이었다. 부족한 부분은 스승을 시봉하며 스승 울타리 안에서 채워나가야 했고, 더는 사람으로서의 사람 노릇을 하는 겨울 소나무 같은 모습으로 이 땅의 불화를 계승하는 불화장으로서의 이름 하나 당당히 얻는 숭고한 시간이었다.

 

누구나 사람을 의지해 살아간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누가 됐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송당 불화장에게도 스승을 떠나보내야 하는 때가 왔다. 지난 2012년 스승 석정스님은 그 숱한 불교문화유산을 남겨놓고 열반에 드셨다. 생사가 둘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버이 같고, 조부모 같고, 더는 곁의 부처이시던 스승을 떠나보내던 때의 슬픔은 2년 여간 지속됐다. 비통하다는 표현이 맞았다. 어린 새에게 날개가 꺾인 것만 같은 아픔이었으니, 남겨진 자의 비애가 가늠되는 구절이었다.

그러나 더 큰 상처는 근원도 모를 말의 성찬이었다. 물론 그도 뛰어넘어야 했다. 2년간의 황망한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스승이 가르쳐주신 않아 있어야 한다.’라는 원칙이었다. 그리고 내생까지 함께 갈 도반, 아내와 부모의 재능을 닮아 조소, 조경, 그림분야에 몰두하고 있는 세 자녀가 있어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부산에서의 생활을 접고 좀 더 한적한 곳, 초연히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을 찾아들어간 곳이 석남사 입구 지금의 담향산방이다. 그곳에서 둥지를 틀고 그 또한 하나둘 문하생을 두고 스승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언제 가장 그립습니까?”

작품을 모신 뒤, ‘작품에서 스님의 향기가 느껴진다.’라는 말을 듣게 될 때입니다.”

스승 가신 지 7년의 세월을 보냈음에도, 스승 석정스님을 얘기하는 그의 눈시울은 붉게 젖는다.

 

스승님의 유물관을 만들어 만 대중에게 보여드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스승님께 받은 은혜에 호리만큼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길이겠지요.”라며 동갑내기 아내를 바라보는 중견 불화장 송당 하경진 화백의 깊은 바람이다.

 

오는 23일 서울 국가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23명의 회원들과 민화, 문인화를 펼쳐보일 전시 계획을 들려주는 그에게서도 국가무형문화재 제 118호 불화장 석정스님의 맑은 향기가 묻어난다. 삶의 중심으로 한 사람의 생애를 이끌어준 불화의 대가 삼락자 석정스님이 길러낸 불교미술의 당당한 후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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