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산림법회 94차 四,十廻向品 第二十五之六 ·十廻向品 8,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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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8-01-11 10:45 조회2,068회 댓글0건본문
피고 온갖 눈으로 분별해서 즐기고 느끼고 감동하고 하는 광경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어두운 사람은 그것을 전혀 모른다. ‘이 꽃은 어찌하야 색깔이 이렇게 고운고 ‘저 하늘은 어찌하야 저렇게 아름다운고 ‘저렇게 변화 무상한고’ 하고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태어나면서부터 눈 어두운 사람은 그 광경을 모른다. 눈 어 두운 사람은 전혀 모르는 세계지만 밝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다반사다. 차 마시고 밥 먹고 농담하는 일처럼 당연한 일이다.
화엄경도 그렇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명확한 사실들만을 이야기해 놓아는데 우리는 아직도 거기까지 못가서 이것이 얼른 와닿지 않는다.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놓으니까 ‘아,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지 사실은 얼른 와닿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운 모습을 눈뜬 사람 은 아무렇지 않게 느끼고 감동하지만 눈 어두운 사람은 도대체가 이해가 안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전부 눈 뜬 사람, 깨달은 사람에게만 미뤄놓을 일은 절대 아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가 눈을 뜨고 조금이라도 진리에 근접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광대한 화엄경을 설해 놓은 것이다. 십이처에서 그리고 자기 몸에서 낱낱이 보리를 구한다고 하였다. 낱낱 이 보리를 구하니 체성이 필경에는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도다. 체관은 분명하게 살피는 것이다.
·불취제법상주상 不取諸法常住相 하고 : 모든 법이 상주하는, 항상 있다는 모습도 취하지 아니하고
·어단멸상역불착 於斷滅相亦不着 하니 : 단멸상에도 또한 집착하지 않는다. 단멸은 없다는 뜻으로 상주상과 정반대의 뜻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이렇게 눈 앞에 있듯이 늘 있는 것 같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그래 서 중도 中道 라는 말이 또 나오는 것이다. 중도적인 안목이라야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중도적 인 안목이라야 한다. 상주상常住相과 단멸상斷滅相을 다 취할 것도 아니고 집착할 것도 아니다.
·법성비유역비무 法性非有亦非無 로대 : 법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없는 것도 아니로되
·업리차제종무진 業理次第終無盡 이로다 : 업의 이치로 볼 때 그 차제가 마침내 다함이 없다. 업의 이치에서는 그것이 다함없이 계속 된다는 것이다.
·불어제법유소주 不於諸法有所住 하며 : 모든 법이 있는 것에도 머무는 바 아니며
·불견중생급보리 不見衆生及菩提 하야 : 중생과 그리고 보리를 보지 아니해서
·시방국토삼세중 十方國土三世中 에 : 시방국토 삼세 가운데 시간과 공간 모든 것에서
·필경구지무가득 畢竟求之無可得 이로다 : 필경에 그것을 구해도 가히 얻을 것이 없더라.
우리가 이렇게 번듯이 보고 듣고 말하고 주고받고 시시비비하면서 살지만 또 어떤 한 면으로 보면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이라. 본래로 적멸한 모습이고 적멸뿐이다. 그러면 서 또한 이렇게 사실과 같이 여여하게 실재한다. 필경무가득이라고 하는 말이 그렇다.
시방삼세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필경에는 그것을 구해도 가히 얻을 것이 없더라. 제법종
본래로 상자적멸상이라.
·약능여시관제법 若能如是觀諸法 하면 : 만약 이와 같이 모든 존재 모든 것, 나부터 너부터 산하대지 산천초목을 관찰하면
·즉여제불지소해 則如諸佛之所解 하야 : 곧 모든 부처님을 이해하는 바와 같아서, 앞서 상주상과 단 멸상이 나왔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있음과 없음이다.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 그렇게 명확하게 이해를 하면 그것이 모든 부처님이 이해하는 바다.
·수구기성불가득 雖求其性不可得 이나 : 비록 그 성품을 구해서 가히 얻지를 못하나
·보살소행역불허 菩薩所行亦不虛 로다 :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보살의 보살행까지도 또한 허망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도다.
말하자면 허공꽃과 같은 만행을 부지런히 닦고 수월도량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불사를 크게 짓는다. 내가 자주 말씀드리는 중도 中道 다. 육바라밀이나 일상 수행에서 중도로써 살아가는 이치를 그렇게 표현을 했다. 그대로 중도다.
비록 그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는 가히 얻을 수 없지만 보살의 소행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살행을 해야한다.
불교의 결론은 보살행이다. 보살행을 자꾸 부르짖고 비록 작은 것이지만 보살행을 해야 된다. 보살행 외에는 불교가 살 길이 없다. 보살행이 진정한 불교다.
아무리 허망하니 어떠니 해도 보살이 행하는 일은 허망한 것이 아니니라.
·보살요법종연유 菩薩了法從緣有 하야 : 보살이 법의 인연으로 좇아 있음을 요달해서
·불위일체소행도 不違一切所行道 하고 : 일체 소행도 행하는 바 도를 어기지 아니하고
·개시해탈제업적 開示解脫諸業跡 하야 : 해탈의 모든 업의 자취를 열어 보여서
·욕사중생실청정 欲使衆生悉淸淨 하나니 : 중생으로 하여금 다 청정하게 하나니 그런 이치를 열어보여서 중생으로 하여금 다 훌륭하게 만든다.
·시위지자소행도 是爲智者所行道 라 :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행할 바 도라.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중도로써 사는 것이다. 있음에도 치우치지 않고 없음에도 치우치지 않고 어디에도 치우치 지 않는다. 배가 어떤 강을 지나가려면 이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저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가 야 한다. 예를 들어서 저쪽 언덕에 사람을 내려줘야 한다면 언덕에서 사람을 내려 주고 얼른 언덕을 벗어나서 또 강물을 타고 내려가야 되고, 이쪽 언덕에 사람을 내려줘야 한다면 이쪽 언덕에 잠깐 닿았다가 얼른 내려주고는 또 강물을 타고 가야 배가 제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어느 언덕이 아름답고 경치가 좋다고 그 언덕에 정박해 있으면 배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중도적으로 사는 것이다.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 살 줄 알아야 된다. 그렇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중도적으로 살라 는 것이다. 그것이 지자의 소행도라고 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의 행할 바 도이다.
·일체여래지소설 一切如來之所說 이로다 : 모든 여래는 전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모든 깨달은 사람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마, 第六廻向의 名
隨順思惟入正義하면 自然覺悟成菩提하리니 諸法無生亦無滅이며 亦復無來無有去로다 不於此死而生彼하면 是人悟解諸佛法이라 了達諸法眞實性하야 而於法性無分別이로다 知法無性無分別하면 此人善入諸佛智라 法性遍在一切處와 一切衆生及國土하며 三世悉在無有餘호대 亦無形相而可得이로다
一切諸佛所覺了를 悉皆攝取無有餘하야 雖說三世一切法이나 如是等法悉非有로다 如諸法性遍一切하야 菩薩廻向亦復然하니如是廻向諸衆生하야 常於世間無退轉이로다
수순 사유하여 바른 뜻에 들어가면 자연히 깨달아서 보리를 이루리라.
모든 법은 생 生 함도 없고 멸 滅 함도 없고 또한 다시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도다.
여기 죽어 저기에 나지 않으면 이 사람 불법 佛法 을 깨달아 알리라. 모든 법의 참성품 분명히 알면 모든 법의 성품에 분별이 없으리라.
법은 성품도 없고 분별도 없음을 알면 이 사람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 잘 들어가리라. 법의 성품 온갖 곳에 두루 있으며 일체 중생과 여러 국토와 삼세에 모두 있어 남음 없지만 그래도 그 형상을 얻을 수 없도다.
일체 모든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모두 다 남김없이 거두어
삼세의 일체 법을 비록 설하나 이와 같은 법은 하나도 있는 것이 아니로다.
모든 법의 성품이 일체에 두루 함과 같이 보살의 회향함도 또한 다시 그러하니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여 항상 세간에서 퇴전함이 없도다.
·제육회향 第六廻向 의 명 名 : 제6회향을 해석하다
·수순사유입정의 隨順思惟入正義 하면 : 수순하고 사유해서 바른 이치에 들어가며
·자연각오성보리 自然覺悟成菩提 하리니 : 자연히 깨달아서 보리를 이루리니
·제법무생역무멸 諸法無生亦無滅 이며 : 모든 법은 생함도 없고 또한 멸함도 없으며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그렇게 줄기차게 외워대는 바로 그 도리다. 불생불멸
·역부무래무유거 亦復無來無有去 로다 : 또한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님이라. 그저 펼쳤다하면 중도다. 이치를 말할 때는 중도를 빼놓고 이야기할 것이 없다.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려고 왔지만 또 가야 된다. 갔다고 해서 그 가는 것이 전부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또 와야 된다.
·오고 가고 가고 오고 이것이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와야 늘 공부하러 올 수가 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각자 사찰에서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길이다.
·어디에 치우쳐서 ‘야, 문수선원이 공부하기 좋고 교실도 좋은데 나 안 갈란다’ 하고 여기 주저앉아 있으면 여기는 지키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또 자기 절은 어쩌란 말 인가. 그런 것은 이치에 안맞는 말이다.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어서
·불어차사이생피 不於此死而生彼 하면 : 이곳에서 죽고 저곳에서 태어나지도 아니하면
·시인오해제불법 是人悟解諸佛法 이라 :이 사람은 모든 부처님의 법을 깨달은 사람이다.
·요달제법진실성 了達諸法眞實性 하야 :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을 요달해서
·이어법성무분별 而於法性無分別 이로다 : 법성에 분별함이 없더라. 이거다 저거다 하는 치우친 분별이 없다.
·지법무성무분별 知法無性無分別 하면 : 법에 성품도 없고 분별도 없음을 알면
·차인선입제불지 此人善入諸佛智 라 : 이 사람은 모든 부처님의 지혜에 잘 들어가는 도리다.
·법성변재일체처 法性遍在一切處 와 : 법성은 일체처와 일체 중생과
·일체중생급국토 一切衆生及國土 하며 : 모든 국토에 두루두루 꽉 차 있다. 법성을 떠나서 있는 것이 없다. 전부 법성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한마디로 뭉뚱그려서 표현하면 법성이다. 너도 법성 나도 법성 산도 법성 하늘도 법성 강도 법성 바다도 법성 전부 법성 아닌 것이 없다. 법성은 일체처와 그리고 일체 중생과 그리고 국토에 변재해 있다. 이것은 공간적인 것이고
·삼세실재무유여 三世悉在無有餘 호대 : 삼세는 시간적인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나머지가 없다. 남은 데가 없다는 말은 다 있다는 뜻이다.
·역무형상이가득 亦無形相而可得 이로다 : 형상은 가히 얻을 것이 없다. 그렇게 법성은 꽉 차있다. 수억만 광년 멀고 먼 끝에 있는 별세계에까지도 다 있지만 형상은 가히 얻을 것이 없다. 법성 은 내재되어 있는 원리이며 형상이 없다.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전부 진여불성이 시켜서 여 기까지 왔지만 찾아보니 손에 안 잡힌다. 법성은 엄청나게 나를 좌지우지하고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전부 그것이 들어서 이러구저러구 하지만 찾아보려니 손에 안 잡힌다.
·그것이 너무 크게 있는 것이 확연한데도 찾으려면 찾아지지 않는 것이다.
·참 대단한 이치다. 화엄경이 아니고 어디서 이런 이치를 만나겠는가.
·일체제불소각료 一切諸佛所覺了 를 :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은 바를 ·실개섭취무유여 悉皆攝取無有餘 하야 : 우리가 남김없이 다 거둬들여서
·수설삼세일체법 雖說三世一切法 이나 : 삼세 일체 모든 법을 비록 설명하고 있으나
·여실등법실비유 如是等法悉非有 로다 : 이와 같은 등의 법이 또한 다 하나도 있는 것이 아니더라. 우리가 이 화엄경을 가지고 이렇게 읊고 저렇게 말하면서 감동하고 또 감동하면서 설명하고 좋아하지만 이와 같은 등의 법이 실로 있는 것이 아니더라.
· 참 기가 막힌 도리다. 이것이 우리 현실 그대로다.
· 무엇이 들어서 그렇게 감격하고 무엇이 들어서 화를 내게 하는가. 그렇게 확실한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로 모두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도대체가 불가사의다.
·여제법성변일체 如諸法性遍一切 하야 : 모든 법성이 일체 두루한 것과 같이
·보살회향역부연 菩薩廻向亦復然 하니 : 보살의 회향도 선용기심 그 마음 잘쓰는 것도 또한 다시 그러함이니
·여시회향제중생 如是廻向諸衆生 하야 :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회향해서
·상어세간무퇴전 常於世間無退轉 이로다 : 항상 세간에서 퇴전함이 없더라. 그러니까 불교는 마음 빼놓고는 아무 이야기도 안 된다.
실제로 달마스님의 저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달마상서 達磨相書 라고 해서 관상을 보는 책이 있다.
그 관상에 대한 이야기의 결론은 만상이불여심상 萬相而不如心相 이다.
족상 복상 관상 두상 수상 등 온갖 이야기를 다 해놓고 만 가지 형상이 불여심상이라. 마음의 모습 같은 것이 없다. 마음 잘 쓰는 것보다 더 나은 형상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잘 생겨도 마음 잘 못 쓰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형상은 꾀죄죄하게 생겨도 마음 잘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렇게 길고 긴 제육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이 이제 끝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선용기심’ 이다. 마음 잘 쓰는 것, 회향하는 것이 결국은 마음 잘 쓰는 것이다. 선용기심, 그 마음을 잘 쓰는 것이 결국 이 제육회향의 포인트가 된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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