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의 불자들이 100인의 스님들께 올리는 가사•장삼 공승제(2017.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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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맑은소리맑은나라 작성일17-07-31 15:11 조회2,415회 댓글0건본문
100인의 불자들이 100인의 스님들께 올리는 가사•장삼 공승제
無比스님 법문
(2017. 6. 13. 전통문화예술 공연장(조계사)
가사정대게袈裟頂戴偈
선재해탈복善哉解脫服무상복전의無上福田衣
아금정대수我今頂戴受세세상득피世世常得被
가사장삼을 준비하고 또 그것을 스님들에게 공양올리고 근래에 참 희유한 보기 드문 공승제입니다.
가사에 대한 이야기는 불설가사공덕경佛說袈裟功德經이라고 하는 가사 공덕에 대한 경전이 있을 정도입니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습니다만 가사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가사라고 하는 옷은 참으로 특별한 옷입니다.
우리가 정대게頂戴偈에서 선재善哉라 해탈복解脫服이여
이 옷 입고 해탈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복전의라고 했습니다. 무상복전의無上福田衣로다.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복전, 복 지을 일이 한두 가지겠습니까만 그 중에서도 제일가는 복전이 가사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금란 가사를 입고, 왕궁에서 내리는 큰스님들에 대한 금란가사 이야기도 기록에도 많이 남아있고 그렇습니다.
양무제도 부러워한 가사
양나라 무제는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일컬을 정도로 불교 역사상 가장 불교에 공헌한 분이고 불사를 가장 많이 하신 분입니다.
스님들을 수만 명 양성해서 교육시키고 사찰과 탑을 무수히 건립을 해서 온 천하에 불국토를 만들었던 양무제는 스님들이 입는
가사가 입고 싶어서 스스로 곤룡포를 벗어던지고 가사로 바꿔 입기를 좋아했습니다.
‘나도 저 스님들처럼 가사 입고 경을 한 번 설했으면 좋겠다’이런 생각이 들어서 경을 설하는 핑계로 늘 곤룡포를 벗어던지고 가사를 입었습니다.
아, 얼마나 근사한 옷입니까. 곤룡포하고도 바꿀 수가 없는, 천자가 입는 곤룡포보다도 더 훌륭하고 위대한 옷이 이 가사입니다.
그리고 이 가사를 입으면 반드시 해탈하셔야 돼요.
반드시 다른 사람의 복전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나 입는 게 아니예요.
일단 입었다면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만큼 책임과 의무가 무겁습니다.
순치황제가 다시 찾은 가사
순치황제의 출가 시에도 보면 당신도 과거에 서방에서 출가한 스님으로서 가사를 입고 살았었는데‘어찌 내가 삐끗 왕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잠깐 한 생각 부러워했던 과보로 그 죄업으로 청나라 때 황제가 되었는데 나 이제 그것을 뉘우치고 깨달았으니 더 이상 곤룡포를 입지
않겠다’하고 곤룡포를 벗어던지고 다시 출가하여 전생에 입던 가사를 찾아 입었습니다.
그런 옷이 우리들이 입은 가사입니다. 이 가사 보통 옷이 아니예요.
김교각스님이 펼친 가사
스님들 가사입고 함부로 하시겠습니까?
정말 가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옷보다도 가장 위대한 옷입니다.
비록 분소의糞掃衣, 다 떨어진 천을 기우고 기워서 물을 들이고 들여서 이색도 저색도 아닌 괴색으로 만든 옷이 가사의 시조이기는 합니다만
요즘은 여러 가지 물질의 발달로 여름이면 여름에 어울리는 가사, 겨울이면 겨울에 어울리는 가사를 골라서 잘 입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김교각스님 있죠.
김교각스님이 구화산에 가서 민씨 부자夫子를 앉혀 놓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절을 지을 땅이 조금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이 가사를 덮을 땅만 있으면 되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 드넓은 땅이 전부 저희 땅인데 스님 가사를 한 번 펼쳐 보십시오.”
김교각스님께서 가사를 펼쳤는데 수백리 99개 봉우리를 그 가사가 다 덮었습니다. 이게 가사의 힘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가사가 꼭 땅을 덮어야 그런 이야기가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에는 가사의 진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진리의 가르침으로, 진정한 불법으로써 온 세상을 다 덮는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가사입니다.
김교각스님이 펼친 가사가 99개 봉우리를 다 덮었는지 안덮었는지는 우리가 상고할 필요도 없고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찌 99개 봉우리만 덮었겠습니까? 중국 천하를 다 덮었습니다. 오늘날 중국 불교가 얼마나 성합니까?
과거는 그만두고라도 이것이 가사의 위력입니다. 가사를 지어서 좀 인연을 맺겠다고 받들어서 올린 우리 불자님들 가사의 의미가
거기까지인 줄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또 가사를 수하신 스님들도 역시 가사의 의미가 거기까지인 줄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김교각스님이나 순치황제께서나 또한 양나라 무제께서나 정말 가사의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평생 가사를 입고 사시는 전문적인 수행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훌륭한 본보기를 보이신 것이고 그것이 가사의 본래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를 잘 알면서 그 막중한 의미에 다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죄송스럽고 송구스럽고 아쉬울 뿐입니다.
가사정대게袈裟頂戴偈
오늘 가사정대게를 특별히 번역을 해서 우리가 앞서 읽었는데요,
훌륭하고 훌륭하여라 해탈의 옷이여 세상에서 가장 높고 높은 복전의 옷이로다.
저희들이 이제 머리에 받들고 받아가지니 세세생생토록 항상 입고 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세세상득피世世常得被, 세세생생토록 항상 이 옷 입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출가해서 스님이 된 것은 다시는 물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어릴 때 그런 원을 세웠습니다.
‘나는 대처승이 되어서라도 승려로서 살겠다. 세세생생 승려로서 살겠다.’그게 무슨 막말입니까?
대처승이 되어서라도 세세생생 승려로 살겠다. 역설적으로 가사 입고 승려생활 하는 것이 그와 같이 보람있고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최고의 보람을 가사를 입고 펼치겠다는 의미입니다.
화엄경 이야기
오늘은 원욱스님이 욕심이 좀 많아서 가사불사에 아울러 <나를 바꾸는 화엄경>이라고 하는 이 두꺼운 당신 공부의 결실을
이렇게 책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한 때 제가 1994년에 화엄경 10권짜리 번역서를 내고 그때부터는 대한민국의 화엄법사는 무비스님이다라고 알려졌었는데
이제 보니까 아니네요. 또 날고 뛰는 젊은 후배들이 아주 많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화엄경 이야기가 났으니까 한 마디만 하고 내려가겠습니다.
화엄경을 흔히 근본 취지, 대지大旨라고 그러죠. 큰 취지를‘통만법 명일심通萬法 明一心’이라고 해서 마음의 도리라고 이야기들 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일부는 맞겠죠. 일부는 맞는데 저는 절대 그것을 화엄경 전체의 뜻은 못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선배스님들이 정해놓은 말에 대해서 조금 죄송스럽지만 그럼 뭣이냐?
선명시성정각하고 후견보현행원입니다.
먼저는 부처님께서 비로소 정각하신 사실에 대해서, 그 정각의 안목, 정각의 내용에 대해서 밝히는 부분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정각의 내용이 무엇이냐?
그것은 이 화엄경을 읽어서 우리가 밝혀내야 할 일입니다.
부처님의 정각은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서양 학자들이 화엄경을 읽고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아,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다. 이보다 더 큰 사건은 없다.
왜냐 무지 몽매한 중생들을 전부 부처로 승격시켰어. 한 순간 과거의 무수히 이 땅을 다녀간 중생들, 현재 살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
앞으로 올 무수한 생명들, 이 모든 이들을 한 순간에 부처로 승격시킨 사건이니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어디 있느냐?’
앞으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온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전부다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 깨달음이기 때문에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러한 깨달음의 내용을 하나도 남김없이 샅샅이 펼쳐보인‘화엄경은 인류사에 있어서 최고의 걸작품이다’서양학자들의 표현입니다.
동양에서는 그런 표현 못해요. 인류사에 있어서 최고의 걸작품이다. 무려 화엄경이 80권이나 되지요.
여러분들 원욱스님의 이 책 인연으로 화엄경에 한 번 심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용은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 것을!
하는 사구게로써 결론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말인가?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보현행원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보현행원입니다.
오늘의 이 가사불사라든지 이 경전불사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가 보현행원의 일환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서 돌아가서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은 바로 보현행원입니다. 보리를 이루고 나서도 보현행원이요.
보현행원으로써 보리도를 이루고, 보리 이룬 뒤에도 다시 뭐한다? 역시 보현행원입니다.
그래서 대승보살 불교는, 가장 우수한 불교 바람직한 불교는 보살대승불교입니다.
그것이 가장 우수한 불교예요.
근래에는 별의별 불교가 많이 한국에 들어와서 뒤섞여 있어서 참으로 혼란을 많이 일으키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가장 우수한 불교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 화엄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그 종지를 세워야 할 줄 믿습니다.
헐벗은 이에게 회향하자
우리나라 스님들로서는 가사가 부족해서 가사 공양 한 것은 아닌데, 이 가사를 우리가 공양올리고 또 공양받고 함으로 해서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헐벗은, 옷을 입지 못하는 중생들, 옷을 입지 못하는 참 불쌍한 부처님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이 가사불사를 해서 불사의 기쁨에 들떠 있을 것만이 아니라 이 가사를 공양올리고 가사를 받는 이 인연 공덕으로 이 지구상에
헐벗은 중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좀 회향이 되어서 모두가 다함께 헐벗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이것이 정행품에서 말하는 선용기심善用其心입니다.
우리 불자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조그마한 일이라도 거기에 중생들을 떠올려서‘중생들에게 이렇게 회향하여지이다’라고 하는 발원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발원을 빠뜨려 버리면 불교가 아니예요. 중생에게 회향하는 발원을 빠뜨리면 불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디 헐벗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지금 우리나라는 아파트 지하에 가면 멀쩡한 새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런 정도로 풍요롭게 살지만 그러나 이 지구상에 헐벗은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 많습니다. 이 생각 한 번 떠올리고 그들에게 회향하여지이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한 번 쯤 우리가 갖는다고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불교가 안아야 할 시급한 문제입니다.
중생이 화두다
진정 불보살님들의 화두가 무엇이겠습니까.
헐벗은 중생입니다. 중생이 화두예요. 간시궐도 아닙니다. 무無자도 아닙니다. 시삼마도 아니예요. 부모미생전본래면목 그것도 아니예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러고 있어요?
진정 우리가 본래 부처님과 보살들이 품었던 화두는 고통받는 중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연히 일어나서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불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뜻은 화엄경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끊임없이 보현행원으로 중생들을 보살피고 중생들을 거둬야 한다는 것,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부터 아주 기본적인 의료와 기본적인 교육은 해결해 줘야 합니다.
중요한 이 사실들에 대해서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불교가 그걸 제대로 못하는 거예요.
자비 자비 하면서 정작 불보살님들의 화두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진정 불보살님들의 화두인지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불교가 손가락질까지 받는 상황입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진정 우리가 다시 상기해야 할 화두는 고통받는 중생들이고 헐벗은 중생들이라고 하는 사실 이것이 불보살들의 진정 가슴에 사무치는 화두라는 사실을 오늘 선언하고 싶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우리보다 못한 이웃들, 고생하는 이웃들 그런 이들을 염두에 한 번 떠올리는 정도라도 한 번 생각하자.”
연탄불공회를 제안합니다
내가 중앙종회와 총무원에 건의한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언젠가 좀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대한민국에 구공탄으로써 연료로 쓰고 음식을 끓여먹고 하는 인구가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아마 구공탄으로 불을 때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에요.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아니 불교계에서 겨울철에 구공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불교계가 전부 책임지자는 것입니다. 그 일에 큰 돈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작하면 너도 나도 다 동참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름 짓기를 만공회처럼 <연탄불공회> 이렇게 이름 지었습니다.
한달에 만원씩 동참해서 연탄으로 밥을 짓고 연탄으로 방을 데우는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도로 우리 불교계가 다 책임지자. 이런 운동을 하자고 내가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부산 불교계 관계자들에게도 이야기를 해놨어요. 그래서 연구 중인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서
힘있는 사람들에게 좀 뭔가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려고 이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까지 올라왔어요.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아도 가사불사나 화엄경 수행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우리 불교가 눈여겨 봐야 할 화두는 고통받는 중생이라고 하는 사실, 불보살들의 마음에 사무치는 화두는 무자도 아니요 간시궐도 아니요 부모미생전 소식도 아니요 시삼마도 아닙니다. 고통받는 중생이 불보살들의 화두라고 하는 사실, 이것 좀 깨닫고 살자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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